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 바람길 2005.06.29
천지개벽 더도 덜도 말고 한 열흘만 퍼부어라 밤낮없이 장대비로 억수같이 퍼부어라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앞이 안 보이게 퍼부어라 뚝이란 뚝은 모두 다 터져버리고 강이란 강은 다 넘쳐 흐르고 노아의 방주처럼 온통 사방 물 천지가 되어라 다 쓸어가버리라 한 알갱이 흔적도 없이 다 훑어라 버려라 다 흘러.. 바람길 2005.06.26
제목을 붙여 주십시오 저 섬은 섬이 아니다 저 섬은 바닷물에 갇혀 섬이다 그럴 때 우린 배가 없으면 가지 못한다 어쩌다가 이유도 없이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저 섬은 어떤 때에는 걸어서도 간다 저 섬은 섬이면서도 섬이 아니다 이름 지을 수 없는 저 섬을 무어라 하랴 우리는 단지 제부도라 한다 섬은 섬일 때 섬이다 그 사.. 바람길 2005.06.25
편지함과 핸드폰 편지함은 늘 열려있다 그러나 오는 편지는 없다 어쩌다가 돈내라는 고지서 연체되었다는 협박안내문 그러고 보니 편지를 쓴 지도 십년이 넘나보다 옛날 밤새워가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한장 두장이 아니라 두루마리종이를 사서 2 미터 3 미터씩 쓴 적도 있었다 참 쓰기도 많이 쓰고 받기도 많이 받았.. 바람길 2005.06.24
빛과 그림자 1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빛이 많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빛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적당히 가려야할 것들까지도 낱낱이 보여준다 이 세상에 어디 아름다운 것들만 있을까 군데군데 여기저기 보기 흉한 것들도 많다 밝은 대낮에 보면 별볼일없고.. 바람길 2005.06.23
쑥갓과 거미줄 쑥갓은 쑥이 아니다 갓도 아니다 쑥처럼 생기지도 갓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쑥향기도 갓향기도 없다 그냥 쑥갓은 쑥갓향기다 쑥갓꽃은 이렇다 사람들은 쑥갓잎을 주로 먹기에 쑥갓꽃은 모른다 쑥갓꽃을 몰라도 쑥갓만 즐기면 된다 어느 하나를 다 알지 않아도 그 하나를 누릴 수 있다 쑥갓은 거미줄을.. 바람길 2005.06.22
선생은 선생이 아니다 바닷가 쓸모없어 방치된 전봇대 밑에 가만 자세히 보면 무엇인가 있다 숨은그림 찾기 같은 이 사진을 잘 살펴보면 깜짝 놀랄 무엇인가가 있다 들고양이 세마리가 전봇대오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미인 듯한 오른쪽 놈은 코치를 하고 두녀석이 번갈아가며 전봇대를 오르고 있다 <에이, 그렇게 하지 .. 바람길 2005.06.18
시방 내 마음 오라 그대여 맨발이면 더 좋고 슬리퍼도 좋단다 가능하면 내 가슴이 아프니 뾰족구두는 신지 마라 걸어도 좋고 뛰어도 좋고 털퍽 주저앉아도 좋고 뒹구른들 누가 뭐라랴 가능하면 내 가슴이 아프니 슬쩍 보고 지나치지는 마라 내 너른 가슴 훌훌 다 벗고 너에게 속살 드러내리니 너 이승에 있는 동안.. 바람길 2005.06.17
길 길은 많다 이 세상에 처음 아닌 길이 없고 또 이세상에 처음인 길도 없다 저 많은 너에게로 가는 길 중에서 나는 꿈길을 택하고 싶다 꿈속에서나 만날 사람 그리운 이여 가도가도 네품속이고 떠나도 떠나도 또 네 품속이란다 이 세상에서 처음 가보는 우리의 길 두려워마라 어떤 다른이들이 이미 갔던 .. 바람길 200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