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질마재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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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1
이른 새벽 너는 늘
샘으로 물 길으러 간다
풀섶을 헤치며
치마자락
다 젖도록
물 길으러 간다
첫이슬 받으면 신령해진다고
정성 다 해 너는 물 길으러 간다
이른 새벽 나는 늘
모시밭 사잇길에서 기다린다
잠뱅이 다 젖도록
풀섶을
헤치며
모시밭 사잇길에서 너를 기다린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다 알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걷던 네 발걸음이
모시밭 사잇길로만 접어들면 새색시 걸음이
되는 것을
나는 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안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른 척 하듯이
네가 날 흘깃흘깃 본다는
것을
나도 모른 척 해야 했다
우리는 적어도 모르는 것처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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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2
무심한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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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3
그런 말 하지 마라
열흘 전 이슬비 내리던 날
모시밭 사잇길에서 나에게 눈을
맞추지 않았더냐
반짝 빛나던 네 눈빛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던 그때
나는 그때의 너를 네
본마음이라 알고 있단다
어머머 그런 말 하지 마오
난 절대로 그런 적 없다오
모퉁이길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눈길 한번 마주친 것 가지고
그런 말 행여 하지 마오
나는 물 긷기도 바쁜 사람이고
눈길 한번 허투루 준 적도
없다오
어찌 그리 응큼에 내숭을 떠느뇨
난 네가 물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을 때만
눈맞춘다는 것 알고 있는데
나는 물동이 깨빡치던 날도 다 보았는데
네 아리따운 모습만 보이려느냐
네 한면만 보여준다면
나는 어찌 할꼬
나도 네가 아는 모습 하나만 보여주랴
몰라요 나도 몰라요
부러 그러는 것 아니지만 나도 몰라요
그렇다고 총각 볼
적마다 히죽헤죽 하리까
내 입장이 조금만 되어 보소
총각의 답답함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나도 내가
답답하다오
석삼년만 더 기다려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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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 말도 맞기는 맞다
너에게 중요한 것이 어쩌다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오는 것일지라도 또 석삼년 기다리다 보면
내가 달라지든지 네가 달라지든지 천지가 달라질 테지만
이
모시밭 사잇길에서의 이 가슴 아리고 조이고 두근대던
우리 둘만의 이 세월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냐
어차피 사람 산다는 거 거기서
거기이고
사랑이란 거 우리라고 뭐 대수이랴 하는 맘이 내맘인데
굳이 네가 온전하고 완벽하고 마음이 움직이고 원할 때에만
나에게
눈을 맞추기로 작정을 했다면 그리 하렴
네 맘에 네 작정에 네 눈길에 네 생각에 맞게
나도 때를
하나 만들리라
내 마음에 한점 때가 없을 때에만
나도 모시밭 사잇길로 나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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