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길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noseein 2005. 6. 29. 11:01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질마재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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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1

 

 


이른 새벽 너는 늘
샘으로 물 길으러 간다
풀섶을 헤치며
치마자락 다 젖도록
물 길으러 간다
첫이슬 받으면 신령해진다고
정성 다 해 너는 물 길으러 간다

 

이른 새벽 나는 늘
모시밭 사잇길에서 기다린다
잠뱅이 다 젖도록
풀섶을 헤치며
모시밭 사잇길에서 너를 기다린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다 알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걷던 네 발걸음이
모시밭 사잇길로만 접어들면 새색시 걸음이 되는 것을
나는 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안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른 척 하듯이
네가 날 흘깃흘깃 본다는 것을
나도 모른 척 해야 했다
우리는 적어도 모르는 것처럼 해야 했다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2

 

 

 

무심한 얘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석삼년을
여기서 내가 너를 기다리고 본다는 것을
너만은 왜 모른 척 하니
지나가는 길에 잠시라도 흘깃 본다고 누가 뭐라냐
이 꼭두새벽에 누가 보며
또 본들 스쳐지나가는 눈길 누가 알랴

 


몽글기도 하고
버겁기도 한 물동이
또아리를 했어도 온몸을 짓눌러
무겁기는 하지요
물은 흘러 눈썹을 간질이지요
고무신은 미끌거리지요
천지사방 거들 떠 볼 틈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네 손을 잡으랴
개구쟁이처럼 입맞춤을 하랴
그저 단지 네 눈길 한번 그것으로 족하거늘
왜 그리 매정하느뇨
네가 그냥 스쳐지나간 뒤
꺼질 듯 내뿜는 내 한숨 소리  너도 들리느냐
눈길 한번 주는 것 그리도 힘드뇨

 


달포전에도 한눈 팔다가
물동이 깨빡치지 않았어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지만
시집 안 간 처녀가 조신해야지요
총각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나는 몰라요
정말 나는 몰라요  알아도 몰라요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3

 


 

그런 말 하지 마라
열흘 전 이슬비 내리던 날
모시밭 사잇길에서 나에게 눈을 맞추지 않았더냐
반짝 빛나던 네 눈빛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던 그때
나는 그때의 너를 네 본마음이라 알고 있단다

 

 

어머머 그런 말 하지 마오
난 절대로 그런 적 없다오
모퉁이길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눈길 한번 마주친 것 가지고
그런 말 행여 하지 마오
나는 물 긷기도 바쁜 사람이고
눈길 한번 허투루 준 적도 없다오

 

 

어찌 그리 응큼에 내숭을 떠느뇨
난 네가 물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을 때만
눈맞춘다는 것 알고 있는데
나는 물동이 깨빡치던 날도 다 보았는데
네 아리따운 모습만 보이려느냐
네 한면만 보여준다면 나는 어찌 할꼬
나도 네가 아는 모습 하나만 보여주랴

 

 

몰라요 나도 몰라요
부러 그러는 것 아니지만 나도 몰라요
그렇다고 총각 볼 적마다 히죽헤죽 하리까
내 입장이 조금만 되어 보소
총각의 답답함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나도 내가 답답하다오
석삼년만 더 기다려보소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4

 


그래 네 말도 맞기는 맞다
너에게 중요한 것이 어쩌다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오는 것일지라도 또 석삼년 기다리다 보면
내가 달라지든지 네가 달라지든지 천지가 달라질 테지만
이 모시밭 사잇길에서의 이 가슴 아리고 조이고 두근대던
우리 둘만의 이 세월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냐
어차피 사람 산다는 거 거기서 거기이고
사랑이란 거 우리라고 뭐 대수이랴 하는 맘이 내맘인데
굳이 네가 온전하고 완벽하고 마음이 움직이고 원할 때에만
나에게 눈을 맞추기로 작정을 했다면 그리 하렴
네 맘에  네 작정에  네 눈길에  네 생각에 맞게
나도 때를 하나 만들리라
내 마음에 한점 때가 없을 때에만
나도 모시밭 사잇길로 나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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