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

뒷간

noseein 2005. 3. 1. 07:40


 


  뒷간은 변소의 우리말로 요사이는 화장실로 통한다. 뒷간은
여러 이름이 있다. 변소; 변을 보는 곳, 측간; 집 귀퉁이에 붙은
건물, 헛간; 다른 장소와 겸용, 북수간; 뒷물이나 목욕도 할 수
있는 곳, 퉁시; 제주도 똥돼지가 있는 변소, 해우실(解憂室); 절
의 변소로 근심을 해결하는 곳 등이다. 

 


  노천의 뒷간은 시골 담장 밖 벽 한구석에 웅덩이를 파고 독
을 묻은 뒤 노둣돌(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헛간은 퇴비를 만들
목적으로 풀이나 재를 모아 두고 노둣돌에서 용변을 본 뒤 삽
으로 쳐 한 곳에 모으고 풀이나 재를 덮어 발효시키는 것이다.
2층뒷간은 윗칸에는 뒷간을 만들고 그 아랫칸에는 헛간을 만
든 것이다. 퉁시는 제주도의 뒷간인데 뒷간 아래 돼지를 키운
다. 똥을 먹고 자란 똥개나 똥돼지의 고기 맛이 훌륭한 것은
알려진 이야기이다.


  한자의 집가자(家)는 한족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겨레가
만든 글자라는 학설이 있다. 집을 뜻하는 갓머리 (    )와

돼지시 (豕)를 합쳐서 만든 글자인데 집안에 돼지를 같이 키우거나
퉁시가 있는 우리 겨레만 만들 수 있다. 이밖에도 휴대용의 뒷
간으로 궁중에서 썼던 매화틀이 있다. 똥을 뜻하는 매(梅)와 오
줌을 뜻하는 우(雨)를 합쳐 매우틀로 부르던 것이 매화틀로 바
뀌었다. 매화틀은 깔고 앉게 되어 있고 우단을 씌웠다. 내용물
은 하인이 꺼내서 치우게 되어 있다.


  요강은 사기나 놋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남녀공용으로 둥그
런 것만 있는데 예전에는 소변전용의 남성용도 있었다. 옛집은
뒷간이 멀고 으슥해서 밤에는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내용
의 요강이 발달했다. 이 외에도 옛날 불국사에서 썼던 돌을 깎
아서 수세식으로 만든 뒷간도 있다.


  송광사는 솥이 크기로 유명하고 선암사는 뒷간이 깊기로 소
문이 나 있다. 절에서는 똥오줌을 낙엽으로 덮는다. 냄새도 적
게 나고 볼썽도 좋고 퇴비도 된다. 중요민속자료26호인 정읍
김씨집 뒷간은 볼일을 보고 쌀겨를 덮게 되어 있어 위생적이고
거름으로 쓰기도 한다.


  옛날의 뒤지(휴지)는 나뭇잎, 채소, 옥수수수염, 새끼, 짚이었
고 그 뒤 신문이나 잡지의 종이가 쓰였다. 1961년 무궁화화장
지회사에서 두루마리화장지가 나왔으나 수요가 별로 없었다.
1971년 유한킴벌리에서 크리넥스BT가 나왔고 1974년 뽀삐의
대히트 이후 1980년대 아파트 붐을 타고 수세식화장실이 늘어
나자 화장지회사가 많이 생겼다. 1997년도 년간 35만 톤의 생
산실적으로 공중변소의 화장지를 훔쳐가던 시절이 옛이야기가
되었다.


  사돈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속담처럼 옛집은 뒷간이 멀고
후줄근했다. 그래서 요강이 아주 소중했다. 요강은 남녀공용이
고 대소변공용이었다. 식구가 많은 집은 초저녁에 넘치기도 했
다. 우습게도 이 요강이 이사를 갈 때는 제일 먼저 갖고 들어
가는 것의 하나였다. 먹는 것만큼 싸는 것도 소중하다는 조상
들의 해박한 건강상식이었다.


  평등의 나라 미국에서도 변소는 상류층과 서민층이 달랐다.
시설뿐만 아니라 명칭도 달랐다. toilet(화장실)과 lavatory(변
소)로 달리 불렸다. 일본 귀족집은 13세기에 들어와서야 변소
가 등장했다. 유럽은 17세기까지 신사숙녀는 물론 왕이나 귀족
까지 으슥한 데서 일을 보았다. 화려한 궁전의 계단 밑이나 암
벽은 오물투성이었다. 중국의 변소는 앞문은 물론 옆 가리개도
없이 십여 명이 태연히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본다. 그러나 아
예 변소가 없는 종족도 있다. 중앙아시아의 몽골족이나 태국
북부의 산악지대, 열대의 숲속에 사는 종족은 사방이 그냥 변
소이다. 


  수세식변소 이전의 변소는 이른바 퍼세식이었다. 똥지게를
진 인부가 온 동네에 구린내를 풍기며 똥바가지로 퍼 분뇨차에
실어 날랐고 줄줄 흘린 똥물 흔적 위에서 아이들은 놀았다. 이
렇게 모인 똥은 썩혀 밭과 과수원의 거름으로 썼다. 똥을 거름
으로 한 먹골배는 그래서 맛있었다. 시골에서는 똥은 물론 오
줌도 소중한 거름이 되었다. 오줌독에는 오줌을 모아 썩혀 명
주옷을 빨거나 텃밭 채소의 거름으로 썼다. 오줌독에 앉은 오
줌버캐는 인중백(人中白)이라 하여 약으로 썼다.


  열이 높거나 조급증이 심한 사람에겐 더운물에 똥을 풀어 먹
였고 악성종기에는 똥을 식초에 버무려 붙여 근을 빼냈다. 판
소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똥물을 마셔 목청을 틔웠고 심한 타박
상에도 똥물을 마시고 땀을 내면 거뜬히 나았다. 똥물은 빈 소
주병에 끈을 달고 입구를 솔가지로 막고 뒷간에 깊이 묻으면
곰삭은 노란 액체만 모였다.

 


  뒷간에는 뒷간귀신이 있었다. 부출귀신, 측도부인, 치귀, 측
신귀신, 정낭귀신 등으로 불리었다. 뒷간귀신은 젊은 색시귀신
으로 노여움을 잘 타서 머리를 풀고 뒷간에서 놀다가 놀라면
사람을 해코지하였다. 그래서 변소에 갈 때는 신발소리를 내거
나 헛기침을 세 번하면 귀신이 숨었다. 이것은 서양의 노크와
같은 문화이다. 쪼그려 앉는 뒷간에서 힘을 주다가 혈압이 높
은 사람이 중풍으로 쓰러지는 일이 있다 보니 생긴 말이다.


   옛날에는 똥물이 가득한 뒷간에서 튀어오르는 똥물을 피해
요령있게 볼일을 보아야 했고 겨울에는 피라밋처럼 얼어서 수
북히 쌓인 똥산을 무너뜨리며 일을 치렀다. 한 데 뒷간에서 한
겨울에 일을 보면 엉덩이가 얼얼했다.
지금의 화장실은 도시에선 수세식이고 잘사는 곳에선 좌변기
에 비데까지 설치하고 잡지까지 비치하여 놀면서 볼일을 보고
손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눈 똥오줌은 그보다 수십 배
많은 물에 섞여 정화조를 거쳐 하천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지금의 똥오줌은 더럽고 귀찮고 처치 곤란한 물건이지만 예
전의 똥오줌은 달랐다. 내 몸에서 나온 똥오줌이 내 몸으로 다
시 들어오지 못하고 그 고리가 끊길 때 우리는 오염된 환경에
서 살게 된다. 똥오줌은 단지 더러운 것이 아니고 거름이 되어
토양을 기름지게 하고 유기농법의 원료가 되어 농약과 비료에
오염이 안 된 식물로 다시 태어나 우리의 먹을거리가 될 때 우
리의 환경은 깨끗해진다. 위대한 똥오줌이여.          

 

 

 

화장실공포증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한 학급이 칠팝십 명씩 되던 60년대이었으니까
시골학교의 변소가 초라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수백명이 우르르 몰려 난리 북새통이었다.

그 날도 오줌을 누려고 빽빽히 밀려 들어갔었는데 갑자기 한쪽 발이 푹 하고 빠져버렸다.
이내 양말이 젖어 왔다. 학생들이 하도 많은지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오줌을 누고
변소를 나와 보니 발에서 지린내가 진동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투성이었다.
징징 울면서 우물가로 가서 발을 씻었다.

변소바닥 한가운데 물이 내려가도록 하수시설을 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 빠진 것이다.
어린이들이 소변을 밖으로 흘리고 쓰레기와 함께 하수구가 막혀

오줌이 가득 고인 곳에 빠진 것이었다.
빡빡 씻는다고 씻었는데 하루 종일 냄새가 났고

일 주일 가량은 혼자 챙피해서 변소에 가기가 무서웠다.

 

그 뒤로 학교변소에 대한 공포증이 생겼다.
그런데다가 시골학교변소에는 지금은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당시는 어린이가 듣기에는 무시무시한 누구누구가 죽었다느니 하는

전설이 많아 변소는 두려운 곳의 하나였다.
학교변소는 소변 보는 곳이 죽 연결되어 있고

그 맞은 편에 대변을 보는 칸막이가 된 방이
십여개 나란히 있었다. 문은 있었으나 잠금장치가 다 고장이 나 있었다.

하루는 변소에 쪼그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는데 어떤 상급학생이 내 변소문을
확 열었다.

그 학생 문을 도로 닫으면서 “ 야 앞뒤도 모르니?”하는 것이었다.
당시 변소 바닥은 송판을 깔고 용변을 보는 곳은 타원형 구멍을 뚫고

소변이 나오는 곳에 송판을 비스듬히 댔었다.

소변받이 송판이 있는 곳이 앞인 것이다.
집의 뒷간은 그런 구별이 없었기에 앞뒤를 혼동한 것이었다.

 

집에 있는 변소도 공포의 대상은 마찬가지였다.

뒷간에 얽힌 온갖 귀신이야기가 소름을 끼치게 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뒷간귀신부터 빨간종이 줄까 파란종이 줄까 하는
귀신까지 별의별 귀신이 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 시골의 뒷간은 집안의 으슥한 한쪽 귀퉁이에 세우거나

집과 떨어진 먼 곳에 세웠고 시골의 밤은 깜깜 절벽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 저녁에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잘 났기 때문에
어른들이 뒷간에 자주 못 가도록 부추긴 점도 많았다.

뒷간에 가려면 일부러 신발을 직직 끌면서 가거나 한두 번 헛기침을 했다.

누가 있으면 뒷간 안에서도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 변소의 구멍이 하도 커서 어린이가 딛고 앉기에는 아주 무서웠다.
자칫 잘못하면 빠지는 사고가 생겼다.

정말로 우리집에 놀러 온 어린 친척 하나는 뒷간에 빠졌었다.

다행이도 금세 건져 목숨을 건졌지만 그 뒤로 뒷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렇게 뒷간에 빠진 아이에겐 똥떡을 해 먹이고 이웃에도 돌렸다 한다.
자주 그런 일이 생겼나 보다.

뒷간은 가끔 퍼서 치웠는데 다 치우고 난 뒷간은 너무 깊어서 꼭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다 밤에 배라도 아프면 그야말로 난리였다. 참을 때까지 끙끙거리며 참다가
식은 땀을 흘리면서 누이를 졸라야 했다.
누이는 아무 군소리 안 하고 뒷간에 같이 가 주었다.
누이는 문 앞에 서 있고 그래도 나는 불안해서 누나야 있니? 하면서 대여섯번은 불러야
안심이 되었다.

여름에는 구더기가 득시글거렸다.

겨울에는 똥이 누는 즉시 얼어붙어 피라미드처럼 수북히 쌓여 그것도 아주 불안하였다.

변소는 군인 철모나 화이바모로 만든 도구로 퍼냈다.
장마철에 건수가 터져 빗물이 변소로 들어가면 변소 안은 물천지였다.
그런 변소에서 큰일을 볼라치면 똥물이 튀어올라왔기에 힘 한 번 주고는
잽싸게 엉덩이를 들고 피해야 했다.

 

어쩌다 학교에서 단체로 산토닌을 먹은 날에는 뒷간 가기가 정말로 죽기보다 싫었다.
지금의 구충제처럼 회충이 녹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토닌은 기절만 시켰나보다.
뒷간 바닥에서 이리 저리 꿈틀대는 회충을 내려다 보아야 한다는 것은
징그럽기보다는 무서웠다.

무엇보다 더 처참한 일은 절반쯤 나오다가 안 나오겠다고 버티는 회충이었다.

엄마를 부르며 울며불며 난리를 쳐야 했다.

이런 화장실공포증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젊었던 시절 길을 가다가 갑자기 뒤가 급했다.

도시에서 화장실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건물을 드나들다가 한 건물에서 화장실을 찾았다.

입구에 재떨이가 있고 담배꽁초가 수북하여 무심코 들어갔다.

급해서였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약간 열려 있는 문을

급하게 확 열고 들어가려다가 기겁을 했다.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화들짝 일어서는 것이었다.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소변기가 없었던 것을 알고

그 속이 여자화장실이란 것을 알았을 턴데.
얼른 문을 닫고 나니 한참을 잘못했다.

그래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그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사죄를 하는 순간
번쩍 뺨을 한 대 맞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옛날의 뒷간이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판자 사이로 감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옹이 빠진 구멍으로 골목길도 내다보던
뒷간이 그리운 이유는. 똥이 단지 똥이 아니라 거름이 되어 농작물을 다시 살찌우던
그 옛날을 생각하면서 지금은 정화조를 거친다지만
아무 쓸모없이 수질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겉만  멋있어지고 순환고리가 끊어진 채 수질만 오염시키는 귀찮은 존재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현대식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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