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

장독대

noseein 2005. 5. 21. 13:27

 

                          장독대



 

  우리는 집을 지을 때 남쪽을 향해 짓는다. 그리고 뒤꼍에는 장독대를 둔다. 장독대는 장을 담은 독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우리 조상들은 세계에 드물게 발효식품을 개발했고 이를 독에 넣어 저장을 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장아찌, 김치류, 젓갈류가 그것이다.  우리가 장독대라 부르는 그 장독은 독 중에서 주로 장을 갈무리한 독이 많다는 뜻이다.

  장독대는 한 집안의 음식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곳이다. 장독대는 남의 손이 미치기 어렵고 햇볕이 바른 곳에 정갈하게 만들었다. 대개는 부엌 뒷문 가까운 뒤란에 만들었고 잘 사는 집에서는 대청의 주축선과 일직선 되는 곳에 만들었다. 남해안이나 서해안의 작은 집이나 뒤꼍이 넉넉하지 못한 집은 양지 바른 앞마당에 두기도 했다.

 



  큰 독들은 뒤로하고 차츰 작은 독들을 나란히 놓았다. 장독이 놓여진  모양새를 보면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간장을 담은 큰독은 뒤쪽에 나란히 늘어 세웠다. 가운데는 된장이나 막장을 담은 중간 크기의 독을 놓았다. 그리고 앞 쪽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를 담은 작은 항아리들을 올망 졸망하게 놓았다. 그런 모양새로 놓은 것은  여인들이 장을 퍼나르기에 용이할 뿐 아니라 장독을 씻고 닦기에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햇빛을 쬐고 바람을 쐬는데도 효과적이다.  크고 작은 독, 항아리, 중두리, 새우젓독, 감항아리, 동이, 자배기, 버치, 방구리, 시루, 소래기 등 갖가지 옹기들이 오손도손 아기자기 모여 재잘대는 장독대는 분명 한국만의 멋이고 자랑이다.

 



  장독대는 돌을 쌓아 다소 높게 하여 햇볕이 잘 쪼이고 바람이 잘 통하며 배수가 잘 되게 만들었다. 장독대 주위에는 감나무 석류 등 벌레가 끼지 않는 나무를 심었고 주위에는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접시꽃 등 붉은 꽃을 심어 부정한 것들이 범접 못하도록 했다.  장독에 버선본을 거꾸로 붙이기도 한다. 이는 장맛을 망치는 나쁜 귀신이 집안으로 들어오다가 거꾸로 붙인 버선본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친다는 생각에서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이끼가 새파랗게 끼고 벌레가 모여들어 들끓는다. 버선본은 이 벌레 특히, 노래기나 지네 따위의 다족류를 쫓으려고 생각해낸 것이다. 다족류의 벌레는 반사되어 되쏘는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독대 뜰에는 맨드라미 봉숭아 등  붉은 꽃을 심는데 그 붉은 기운으로 장독대를 침범하려는 귀신의 기운을 쫓으려는 뜻에서 심는다. 또한 실제로 뱀은 봉숭아를 싫어한다.

 



  옛 여인들의 일과는 부엌과 장독대, 텃밭과 광, 빨래터와 우물가를 오가는 일로 다 보냈다. 장맛은 여인의 손길에 따라 맛이 든다. 장독은 여인의 정성에 비례하여 반짝반짝 윤이 났다. 날씨에 따라 열고 닫고 훔치고 다듬어 햇볕과 눈비, 이슬과 바람을 잘 다스려야 장맛이 살아났다.   옛 여인들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꼭두새벽 아무도 모르게 장독대에 꿇어앉아 정화수 앞에 기도하는 여인상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장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였던 만큼, 장독대를 성역으로 여기고 장독을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남지방의 '철륭' 또는 '철륭할마이'와 중부 및 남부의 '칠성'이 그들이다. 터주가 집의 앞쪽을 지키는 데에 반해, 철륭신은 뒤쪽을 관장한다.

  유목민족이나 해양민족에게는 장독대가 없다. 그들은 정착생활을 하지 않을뿐더러 발효식품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크고 작고 차이는 있을망정 어느 집이나 장독대가 있고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다. 우리 겨레는 농경민족이었다. 흙과 더불어 사는 흙문화였다. 땅기운을 받고 자랐다. 옹기는 흙의 정기가 숨쉬는 그릇이다. 여러 가지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 확인되었듯이 우리의 옹기는 숨을 쉰다. 이런 좋은 옹기에서만 숨을 쉬어야 제맛이 나는 장이나 김치가 익어 제맛을 내는 것이다.

  옹기는 흙으로만 빚은 질그릇과 오짓물을 입힌 오지그릇으로 나뉜다. 유약이라고도 부르는 오짓물은 갈잎재에 바람단지의 뙤밑흙이나 북풍받이의 서릿발이 서는 흙을 섞어 만든다. 구울 때도 장작만으로 이렛동안 불을 때서 섭씨 1200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오짓물의 독이 없어지고 옹기가 미세한 호흡을 하여 숨쉬는 그릇이 된다.

 



   눈길을 확 끌지만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페르시아도기이고 눈을 끌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조선의 질그릇이라고 프랑스의 에밀 마텔은 노래했다. 옹기는 우리 겨레를 닮았고 그 주인을 따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러나 일본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광명단이라는 유약이 들어 왔다. 광명단은 납을 주성분으로 한다. 반짝거리고 화려해서 사람들이 좋은 줄 알고 많이 찾았고 하나 둘 옹기장이들이 광명단을 쓰기 시작했다. 광명단을 쓰면 굽는 온도도 낮아 작업이 유리했다. 그러나 광명단으로 구운 옹기는 김치나 장과 어우러지면서 납 성분이 우러나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독을 내뿜는 독 그릇이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옹기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기술이 발달하면서 알미늄그릇과 플라스틱그릇이 나와 사람들은 더욱 옹기를 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냉장고가 보편화되고 핵가족화 하면서부터 장을 담가 먹는 사람이 줄고 너도나도 간장 된장 고추장을 사 먹게 되었고 산업화 때문에 도시사람들은 이사를 자주 하였는데 덩치 큰 독들이 짐이 되어 옹기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려지고 깨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버려지는 옹기를 모아 실내장식으로 쓰고 어떤 사람은 외국으로 수출 또는 밀반출을 한다고 한다. 선진 외국에서는 한국의 커다란 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그들은 한국 독의 신비한 성능과 미적 가치를 안 것이다.

 



양옥식 집이 들어서면서 장독대는 광이나 헛간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아프트가 생활화 하면서부터 베란다가 장독대 역할을 하다가 이제는 너도나도 김치냉장고가 장독대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전통의 옹기장이들은 사라지고 신비의 기술은 알 길이 없게 되었고 우리의 독들은 산산이 깨어버렸는데 그 독들이 외국에서는 침을 흘리는 대상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창피한 일이랴. 옹기는 고려청자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백자처럼 선비의 모습도 아니다. 옹기는 투박하면서도 은은한 서민의 솔직 담백한 맛이다. 고려청자나 백자나 분청사기만이 국보요 보물은 아니다. 머지않아 명맥이 끊기고 사라질 우리의 맛과 멋,  옹기를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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