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야생화에 미친 사람

noseein 2007. 10. 18. 09:25

 

 

 

 

책    명 : 너 꽃 해

출 판 사 : 도서출판 새벽  전화번호  02-933-0893

판    형 : 46배판

내    용 : 꽃과 시  전 칼라 376쪽


이십년 동안 야생화에 미친 사람

김종태 시인은 1953년 서울 변두리인 중랑구 묵동 먹골 과수원집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대한전선 직장을 12년 다녔다.

야생화 시집을 만들기 위하여 38세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서원한 야생화 시 5백편, 야생화 1천종의 사진 10만장을 찍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했다.

1990년 <이별을 위한 발라드>로 시작생활을 한 뒤

<내몸의 버리는 것에 관한 보고서>

<스카치테이프사랑> 등 사랑에 관한 시와

<그때를 아십니까> <촌스러운 것에 대한 그리움>등 민속에 관한 책과

물질문명을 비판한 <리모콘><점>을 썼다.

특히 그는 첫 야생화시집 <풀꽃>을 비롯하여 <내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번에 20년 역작인 < 너 꽃 해> 를 펴내게 되었다.

그는 20년째 자원봉사로 솟대문학 편집장일을 하고 있다.

그는 테마시집을 주로 내고 있다.

야생화시 <잡초는>은 월간조선이 선정한 <한국명사 100인이 뽑은 명문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집 <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는 1997년도 문화관광부선정 청소년추천도서로 뽑혔다.

그는 모든 앎과 지혜가 우리 모두의 공동재산이라고 강조한다.

오늘도 그는 인터넷  여러 곳에 꽃사진과 글을 올리면서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고 무료로 누구나 애용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처음엔 야생화 열 가지도 몰랐다.

1987년 까지는 그도 야생화의 이름을 열 가지 정도밖에 몰랐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아는 몇 가지들, 어릴 때 갖고 놀던 것들이었다. 냉이, 씀바귀, 질경이, 쇠비름, 돌나물, 방동사니 등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8년 쯤 시장통에서 좌판에 냉이를 놓고 파는 할머니와 그 냉이를 보고 가슴에 와 닿는 뭉클한 것이 있었다. 그때 새삼  우리 주변에 야생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야생화와 우리 서민들은 무엇인가 서로 닮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야생화를 가지고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야생화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하루에 꽃이름 두 개씩만 안다고 해도 일 년이면 백 개밖에 모르는 셈이었다. 게다가 언제 시를 구상하고 다듬어 한편의 시를 쓰겠느냐. 심사숙고를 해야 했다. 책 한권을 내려면 적어도 십년은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야생화 시집 하나를 내기 위해  12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적어도 이사 자리는 보장이 되었던 첫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에서 고참과장 자리를 끝으로 38세에 야생화시인의 길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그때 계산으로  총 수입의 3분의 1이 날라가는 셈이었다.


그토록 찾던 타래난초를  처음 보고 한참을 울었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 아침이면 산과 들로 나가고 저녁이면 돌아왔다. 도감에서 타래난초를 보았는데 너무 오묘하게 생겨서 찾고 싶었다. 경기도 들판에 많이 자란다는데 아무리 쏘다녀도 타래난초는 보이지 않았다. 한 세월이 흐른 뒤 망우리 공동묘지 산소를 뒤지던 그는 드디어 타래난초를 발견했다. 산소 잔디에서 늠름하게 자태를 뽐내는 타래난초를 보고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한뼘 정도 되는 꽃대인데 잎사귀는 아주 작고 잔디에 가려 보이지 않고 꽃이 피어야만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꽃대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면서  그 틈새마다 작고 오묘한 꽃이 돌아가면서 피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가련하고 대견하여 기쁨과 슬픔에 한참을 울었다. 그 뒤로 타래난초는 산소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었다. 타래난초는 봄에 알뿌리에서 잎이 돋아나고 자라서 꽃대를 올리고 여름에 꽃을 피운 다음 추석 벌초 이전에 씨앗을 완성하는 것이다. 생존의 슬기였다.


도리없이 카메라맨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꽃을 찾아다니다가 터득한 것이 있었다. 화무십일홍 - 꽃은 열흘을 못간다는 뜻이다. 카메라는 놀러 가서 찍는 것밖에는 모르는 그가 헌 카메라를 들고 야생화를 찍겠다고 들이댔다. 보통 꽃들은 접사를 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실력 가지고는 되지 않았다. 필름 수백 통을 없애가며 인화값 수백만원을 들여가며 사진을 찍어댔다. 나중에는 꽃시를 쓰기보다는 꽃사진을 찍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가며 홀로 사진기술을 익혀가며 야생화와 가까워졌다. 지금은 디지탈카메라 마련하여 한번 꽃사진을 찍으러 나가면 300장  정도씩은 찍어 온다. 그래도 30장 정도밖에 못 건진다.


뒹구르고 넘어지고 빠지고 다치고

그는 장애인이다. 젊어서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모두 절단하고 대퇴부의족을 끼우고 다닌다. 산과 들로 다니면 길이 평탄하지 않기에 일반인들도 힘든데 그는 아주 젬병이다. 논둑길을 가다가 넘어지고 빠지는 것은 일상 다반사이다. 어떤 야생화는 산비탈 돌 틈에서 자라는데 그걸 찍으러 기어 올라가다가 뒹구르고 미끄러지고 넘어진다.  눈을 찔려 열흘 병원도 다녔다. 뙤약볕에 도감을 펼치고 이름을 찾다가 일어나면 현기증에 팽그르르 돌 다가 넘어질 때가 허다하다. 늘 청바지는 진흙으로 범벅이고 여름철이면 배낭에 카메라에 지팡이에 온통 정신없이 다니면 땀은 대수가 아니었다. 걱정은 땀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필이면 카메라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니다가 집에를 오면  옷에서 소금이 떨어지는데 스푼으로 하나씩은 나온다. 차를 끌고 산골길을 가면서 창밖으로 꽃을 살피다가 돌에 부딪치거나 골창에 빠지는 것은 흔하다. 남들은 한시간이면 올라가는 산길을 그는 세시간을 걸쳐 올라간다. 그러나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몇 달  몇 년에 걸쳐서 몰랐던 이름 하나 알면  그날은 가장 행복하고 새로운 꽃 하나를 발견하면  <심봤다>이며 꽃시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일주일이 행복했다.


다리도 눈도 내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아

다리 하나 없는 채로 잘  버티어 나갔다. 그는 야생화 이름을 알기 위하여 들판에서 도감을 펴놓고 하나하나 대조하며  도감을 뒤지곤 했다. 그 날도 들판에서 도감을 펴놓고 꽃이름을 한참을 찾다가 일어서려는데 눈이 어질어질하였다. 늘 있던 현기증 정도로만 여겼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눈이 얼보였다. 다음날이 되어 보니 왼쪽 눈에 보이는 사물은 모두 오른쪽으로 45도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것이었다. 오른쪽 눈으로 전신주를 보면  똑바른데 왼쪽 눈으로 전신주를 보면 120도 구부러져 보였다. 병원에 가보니 망막박리란다. 교통사고로 서서히 망막이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 때는 한창  우리나라 처음으로 병원들이 파업을 하던 때였다. 석달 뒤 수술을 하였으나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그 뒤 세 번 더 수술을 하였으나 그의  인생은 한눈으로 충분히 살 팔자였나 보다. 공교롭게도 왼쪽 다리 왼쪽 눈이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한 다리 한 눈은 야생화를 이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는 그의 정열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한다. 조금  아주 조금 불편할 뿐 산과 들을 헤매고 사진을 찍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왼쪽 다리를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이랴. 모든 오토매틱 차를 운전할 수 있으니. 오른쪽 눈만 보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랴. 카메라 들여다보는데는 오히려 편하더라.


사람도 뱀도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오로지

꽃사진을 찍다보면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등산로에는 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다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뱀도 만난다.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떤 때에는 알을 품던 새가 놀라 푸드득 날아가는 바람에 그가 더 놀란다. 벌은 같이 노는 친구가 되었다. 어떤 때에는 고라니가 후다닥  튀어나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는다. 때로는 조용한 숲속에서 나 혼자인 줄 알고 사진을 찍다가 약초꾼을 만나면 놀라기도 한다. 정말  사람이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다른 데 있다. 꽃은 주로 산골짝에 많다. 깊은 산골짝에는 대부분 휴대전화가 불통이다.


비탈을 오르거나 내려가다가 자칫  잘못하여  뒹구르는 날이면  낭패이다. 그러다가 바위에 부딪기라도 하는 날에는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실족하여 발이라도 부러지거나 삐면 어디라도  다치게 되면 언제 누가 구해줄지 까마득하기만 한 것이다. 산골짝이고 등산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가 힘든 것이다. 아침에 출사할 때마다 무사를 기도하고 끝나고 돌아오면 죽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의 사진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이 아름다운 세상  널리 함께 나누고 싶어

그가 첫 꽃시 <냉이>를 쓴 지 꼭  20년 되는 올해 드디어 세 번째 시집 <너 꽃 해> 가 나왔다. 이번에는 삼세번이라 준비를 철저히 했다. 책도 가장  크게 만들었고 꽃시가 175편  실렸으며 꽃사진은 700장  넘게 들어갔다. 큼직하고 두툼하고 화려하고 자세하고 아기자기하고 충실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하나님에게 서원한 것이 있었다. 야생화시 500편 꽃사진 1000종 10만장을 위해 그는 그의 인생 모두를 걸겠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나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게 하겠다고.  그의 컴퓨터는 온통  꽃사진투성이이다.  6만장 가까이 된다.


앞으로 남은 생애 모두를 야생화에 바치겠다

그는 죽을 뻔한 사람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한창  젊던 30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전철과 박치기를 하여 80미터를 끌려가면서도 살아난 사람이었다. 곰곰 생각해봐도 덤으로 얻은 인생이다. 그때부터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가 갖고 그가 알고 그가 배운 모든 것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다 사회에 환원하고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갚고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가 대학교를 나왔다고 그 지식이 그의 것인가? 16년을 배웠어도 그 보답은 나라와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가 20년간 홀로 알고 배우고 터득한 이 모든 야생화의 세계, 그것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화이며 자산이며 예술이다. 적어도 그것으로 먹고 살지 않는 이상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정신활동의 산물은 우리 모두의 재산이 되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선비들은 돈과 명예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다. 서당훈장 선생은 겉보리 한말에도 남의 자식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도 인터넷  여기저기에  꽃사진과 꽃시를 올리면서 그는 이제야 조금씩 그가 이 세상에게서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재산을 모으셨고 당신들을 위해서는 한푼도 못쓰시고 모두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부모님 덕택으로 그는 오늘 또 한권의 시집을 낸다. 아직도 그는 모든 사람들의 덕택이 더 많은 삶이라고 생각다. 그는 앞으로 남은 생애 모두를 야생화에 바치겠다고 맹세를 다짐한다.

                  

그가 주로 글과 사진을 올리는 싸이트 주소이다.

http://zermo.com.ne.kr/

http://blog.daum.net/wildflower

http://blog.naver.com/noseein

http://apple.chol.com/wondum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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