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멀리 있는 빛

noseein 2015. 9. 19. 12:14

 

 

 

멀리 있는 빛

 

                      김영동

 

 

6월 16일 그대 제일에 나는 번번이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지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가던 좁은 잡초 길엔
풀꽃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피어 있겠지
 
음 --
금년에도 난 생시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대신에 산아래 사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시집 한 권을 등기로 붙였지.
"객초"라는 몹쓸 책이지 상소리가 더러 나오는 한심한 글들이지
첫 페이지를 열면...... 

 

그대에게 보낸 저녁 미사곡이 나오지 표지를 열면 그대는 저절로 웃음이 날 꺼야
나같은 똥통이 사람돼간다고 사뭇 반가워 할 꺼야
음 - 물에 빠진 사람이 적삼을 입은 채 허우적허우적 거리지
말이 그렇지 적삼이랑 어깨는 잠기고 모가지만 달랑 물위에 솟아나 있거든.

머리칼은 겁먹어 오그라붙고 콧잔등엔 기름 칠을 했는데
동공아래 파리똥만한 점도 꺽었거든


국적없는 도화사만 그리다가
요즈음 상투머리 옷고름, 댕기, 무명치마,
날 잡아 잡수
겹버선 신고 뛴다니까

유치한 단청 색깔로 붓의 힘을 뺀 제자를 보면
그대의 깊은 눈이 어떤 내색을 할지......

나는 무덤에 못가는 멀쩡한 사지를 나무래고 침을 밷고 송곳으로 구멍을 낸다우
간밤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이렇게 시든다우
꿈이 없어서 꿈조차 동이 나니까 냉수만 퍼 마시고 촐랑 대다 눞지
머리맡에는 그대의 깊고 슬픈 시선이 나를 지켜주고 있더라도 그렇지
싹수가 노랗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어떠우.....

 

******************************************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서정주  길마재 신화 중에서

 

 

 


 내가 시를 쓴다고 해서가 아니라
 성격상 남의 시를 많이 읽지 않는 나지만
 젊어서부터 이유도 없이 좋아하던 시가 있었다
 서정주님의 제목이 긴 위 시이다
 그때에는 뭔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했었는데
 나이가 제법 든 지금 생각해보니
 이 시의 깊은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시에서 <나>는 <그 애>를 늘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애도 내가 자기를 지켜보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 애가 나에게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 애도 잘 아는데
 그 애는 늘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를 때에만 나에게 눈을 맞춘다
 그 애는 내가 항용 나에게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하는 줄 잘 알면서
 언제나 그 애는 당연한 듯이, 운명인 듯이, 도리 없다는 듯이
 당연한 것처럼,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아예 그럴 생각도 없이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를 때에만 나에게 눈을 맞춘다

 동이의 물을 이고 오면서
 물 조금 엎지르거나 흘리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이랴마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서운할 정도로, 화가 날 정도로
 그 애는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를 때에만 눈을 맞춘다
 나와 그 애의 성격차이인가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가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의 차이인가
 자기 자신이 완벽할 때에만 눈을 맞추려는 그 심리는 무엇인가
 모든 내가 그럴까?
 모든 그애가 그럴까?
 우리 둘만의 차이일까?
 그 차이마저 별 것 아니고 그냥 작은 일화이거나 일상사인가?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고 인생을 맞추는 사이라면
 물 흘릴 때나 안 흘릴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한가할 때나
 늘 곁에서 지켜보고 힘이 되어주고 같이 희노애락을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럴까
 모른다
 아직도 모른다
 모른다
 몰라도 된다고 해도
 나는 아직도 모른다
 
 아직 나에게 그대는 <멀리있는 빛>이고
 여태 그대에게 나는 <차디찬 새벽>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