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엔 특히 묵란이 유행했는데 秋史(추사 金正喜),大院君 (이하응李是應),
芸梶 (운미 민영익閔泳翊)은 모두 이시대에 나온 난초의 대가들이다.

사군자는 계절별로나누어 볼 수 있다.
"대나무를 그리는 것은 초서를 쓰는 것과 같으니
속될 것을 염려하지 청초한 것을 염려하지 않네.
매화를 보는 것은 말을 보는 것과같으니,
뼈대로 하는 것이지 생김새로 하는 것이 아니네" -南宋의 강특립-
'아직 매화보(梅花輔)는 보지 않았으나
손가는 대로 그려내니 스스로 신(神)이 있네.
뜻대로 안 되면 시험삼아 천만 그루를 보았나니
동풍(東風)이 불면 곧 봄을 이루리.' -서위(徐渭)-
앞사람의 예술을 배우는 태도는
그 마음을 배우는 것이지 자취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계승한 기초위에 자기자신의 독창성을 발휘 하여야만 한다.
그림은 마치 봄바람이 불어오면 꽃이 저절로 피어나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법칙이 이루어져 신운(神韻)이 포함되어야 한다.
蘭
난초(蘭)는 여름철(夏節)을 대표한다고 볼 수가 있다.
난은 옛부터 심산 유곡(深山幽谷)에서 홀로 피어잇는 고고한 식물이란 뜻으로
옛부터 난을 비유하는 말로 유미인(幽美人)
공곡유향(空谷幽香),군자가패(君子可佩), 왕자지향(王者之香) 등이 있으며
그 향기는 특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난은 그 종류도 많을 뿐 아니라 재배도 까다롭다.
대개 동양란과 서양란으로 대별되고 동양란은 다시 소심란(素心蘭),
보세란(報歲蘭),건란(建蘭),석두란(石두蘭),학정란(鶴정蘭) 등이 유명한데
특히 풍란(風蘭)은 한국 홍도에 밖에 없는 귀한 것이다.
묵란의 시초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송대(宋代)의 문인인 정사소(鄭思消-所南)조맹견(趙孟堅)등이
묵란을 그렸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宋代엔
상당히 묵란법(墨蘭法)이 성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末의 충신이요.그 시대의 문인이던 정소남(鄭所南)은
송나라가 망하고 원元나라가 들어서자 자기가 살 땅은 없다고
개탄(慨歎)하면서 스스로 뿌리가 드러난 蘭을 그리기 시작했다.
더러운 다른 민족(異族)의 땅(몽고족을 북오랑케라고 함)에
蘭을 심지 않겠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일조의 반항정신이요.반체제의 예술이다.
이렇게 해서 노근란(露根蘭)이 사란( 寫蘭)의 한 양식으로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 노근란을 정소남지유의 (鄭所南之遺意)라고 말하고 있다.

梅
梅는 고결한 선비나 정절의 여인을 상징한다.
아직 매화보譜는 보지 않았느나
손 가는대로 그려내니 스스로 신이 있네.
뜻대로 안되면 시험삼아 천만 그루를 보았나니
동풍이 불면 곧 봄을 이루리 - 서위 -
徐文長集」,卷12 .「題花梅」.
從來不見梅花譜, 信手拈目油神. 不信試看千萬樹,東風吹着俓成春.
어떤 화가의 글에 매화의 아름다움이 절실하게 표현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수묵(水墨) 빛깔로 퇴색해버린 장지도배에 스며드는 墨痕처럼
어렴풋이 한 두개 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이조 후기의 畵員이었던 양기훈(楊基薰)의 월매도(月梅圖)의 題엔
한글로만....
흰바탕 맑은 향기 기특도 하여
어가의 낮은 울에 비끼었구려
눈이냐 얼음이냐 정망 어여뻐
차 마시는 자라에 가장 알맞네
달이 밝아 동서의 그림자뵈고
봄이오니 남지,북지,분간 못할래
더구나 밤길고 서리찬 곳에
흥그려 붓을 잡고 또 시를 쓰네.
어떤 꽃이고 아름답지 않은게 있을까마는
유독 매화의 아름다움을 동양인들이 더 높이 본 것은
백화(百花)가 없는 빙설리(氷雪裏)에서 홀로 고고하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청정(淸淨)하고 무구(無垢)한 품격은 옛부터 高士나 君子로 비유되어
時俗에 굴하지않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해 왔다.
매화를 최초로 작품으로서 그린 작가는 唐의 변만(邊灣)이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문인 묵객간에 모티브로서 유행을 본 것은 역시 송말의 文人畵의 왕성기에 이른다.
이 후 明대의 왕면(王冕),淸대의 김준명(金俊明),...등과
한국에 있어선 고려의 정지상(鄭知常),
이조의 조희룡(趙熙龍),어몽룡(魚夢龍-國朝의 第一이라 불리웠다.)
조희룡은 정조시대의 화가인데 매화에 얽힌 이야기로는
매화를 특히 즐겨그렸던 그는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치고
그 안에 누워서 매화백영(梅花百詠)을 짓는데
벼루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을 썼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煙)을 써서 시구가 다 되면
편을 지어 매화백영루(梅花百詠褸)라 하였다 한다.
그림을 그리다가 목이 마르면 스스로 담근 매화편의 전차(煎茶)를 마셨다 한다.
시종 매화와의 인연이 없이는 모든 것도 이룰 수 없는 지독한 매화애찬가였다.
竹
'대나무 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며 길게 읊조리는데,
깊은 숲속에 아는 사람 없고
밝은 달빛만이 조용히 비추이누나.' -唐,王維-
竹은 겨울철을 대표한다고 한다.
사시로 청청 불변하는 상록수로서 그 탈속의 취향을 특히 문인들이 좋아하여
사군자중의 군자로서 귀함을 받아왔다. 사시로 푸르고 또 곧고 강인한 줄기는
옛부터 충신열사(忠臣烈士)와 열녀(烈女)의 절개(節介)에 비유하여 왔다.
예부터 문인 묵객(文人墨客)들은
대나무가 가진 이같은 품성(品性)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겨왔다.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집(四佳集)에도 대나무는 굽지않고
그 줄기가 유독 곧고 발라서 가히 천지간에 맑기가 으뜸이라고 말했다.

죽은 언제쯤부터 시작되었는가
당대(唐代)에 시작되어 송대(宋代)에 크게 유행하고
원(元)대에 까지 계승된 묵죽은
특히 원대에 와서 많은 뛰어난 대표적 명가들이 나왔다.
이는 당시 남의 민족의 지배(外族治下)인 원(元)에 살던
유목(流牧), 실향(失鄕)의 문인 묵객들이 스스로를 달래던 한 소재로서
청고경직(淸高勁直)한 품성의 竹을 많이 택했다.
이 때에 뛰어난 名家들이 많이 나왔었다.
오중규(吳仲圭-梅花道人)라는 분은
元末의 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竹을 50년을 그렸다고 한다.
淸의 정판교(鄭板橋)도 50 여년간 蘭竹만을 그렸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대나무만을 그린 셈이 된다.
특히 元의 대가들은 墨竹을 좋아해서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미쳐
李朝初期엔 이정(李霆),유덕장(柳德章)같은 이름난 화가가 나왔다.
이정은 세종(世宗)의 현손(玄孫)으로 묵죽을 잘그려 동방의 제일 명가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엔 예부터 竹을 잘하는 것을 제일로 치는 관습이 있었으나
經國大典에서도
試竹,山水人物花草中 二才, 竹爲一等, 山水二等,人物翎毛 以上等而上之 各加其分」
즉 죽의 작화를 산수,인물,화초 위에다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추사(秋史) 金正喜의 뢰운 묵죽화(雷雲墨竹畵)에도 「吾東傳工墨竹 畵科品在山水上」
(우리나라에서는 묵죽을 전공하면 화과의 품등이 산수위에 있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경국대전 속에 있는 말과 같은 것이다.
죽은 일기와 생태에 따라 구분되니 청죽(晴竹)과 앙죽(仰竹),노죽(露竹)과
수죽(垂竹),우죽(雨竹-垂竹),풍죽(風竹),미풍죽(微風竹), 월죽(月竹),
월야죽(月夜竹),풍월죽(風月竹) 등으로 불리우는 이름이 그것이다.
일기와 생태에 따라 그 작화법도 달라지고 있음을 유의해야한다.
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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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이 그리는 四君子에는 네가지 갖추어야 할 문인화의 가치가 있다.
이것은 기이한 것이아니고 문인의 性靈과 感想을 발휘한 것에
지나지않는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문인화의 요소 가운데
첫째는 人品이고, 둘째는 學問이며, 세째는 才情이고 ,네째는 思想인데,
이 네가지를 다 갗춘다면 가장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