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길
쑥갓과 거미줄
noseein
2005. 6. 22. 07:58
쑥갓은 쑥이 아니다
갓도 아니다
쑥처럼 생기지도 갓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쑥향기도 갓향기도 없다
그냥 쑥갓은 쑥갓향기다
쑥갓꽃은 이렇다
사람들은 쑥갓잎을 주로 먹기에
쑥갓꽃은 모른다
쑥갓꽃을 몰라도 쑥갓만 즐기면 된다
어느 하나를 다 알지 않아도 그 하나를 누릴 수 있다
쑥갓은 거미줄을 신경쓰지 않는다
쑥갓 자라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거미줄도 쑥갓에게 미안해 하지 않는다
거미줄은 거미줄대로 쑥갓은 쑥갓대로
서로 자기 자신에 충실할 뿐이다
거미줄이 무서워 쑥갓에 벌나비가 안 오지 않는다
벌나비 잡는다고 쑥갓이 거미줄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벌나비는 열심히 쑥갓꽃에 앉고
거미는 열심히 때를 노리고
꽃은 열심히 씨를 맺는다
십년이 훨씬 넘는 끈질긴 인연
내 청춘과 함께 자란 천리안
미움과 못마땅한 것도 미련도 원망도 사랑도
다 좋은 세월 따라 흘러가버리고
지금은 늙고 모지라진 나처럼
추억이나 반추하며 중풍 걸린 거인 같은 천리안
천리안은 쑥갓이고 나는 거미줄이고
그대들은 벌나비쯤 되려나?
내가 벌나비 할 테니 그대들이 쑥갓이 되든지
나나 그대들은 쑥갓이나 벌나비 하고
그래 천리안이 거미줄인가 보다
아무 뜻 없는 것 같으면서도
끈질긴 인연
계륵만도 못한 Z 아이디의 슬픔
씽씽 콧노래를 부르며 잘나가는 이웃집들을 보면서
그래 너나 나나 이제는 서로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는 시절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