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

화로

noseein 2007. 12. 18. 10:18




화로



화로는 불을 담아 놓는 그릇이었다.
재료에 따라 질화로, 돌화로, 무쇠화로, 놋쇠화로 등이 있었다.
질화로는 주로 서민이 사용했고 오지를 구워 만들었으며
자배기를 닮았고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받침은 없었다.
무쇠화로는 질화로보다 각이 지고 발이 셋 달렸다.
부유층에서 쓰던 놋쇠화로는 개다리 같은 발이 셋 달렸고
너른 전이 달려 전화로라고도 했다.
돌화로는 보온성이 좋고 공예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밖에도 큰 밥그릇만한 휴대용의 사기로 만든 손화로가 있었고
미의 극치인 은실을 새겨 넣은 은입사백동화로도 있었다.


부잣집에서는 참숯이라 하여 참나무로 만든, 숯장사한테서 숯을 사서 썼지만 서민들은
아궁이에서 취사 및 보온용으로 불을 때고 난 뒤
남은 숯불을 사그라지기 전에 썼다.
단열용으로 재를 밑에 깔고 숯불을 담은 다음 다시 재를 위에 덮어
불이 쉬 사위는 것을 막았다.

이 화로는 난방, 취사, 바느질용으로 두루 쓰였다.
화로는 이동이 용이하고 아궁이의 폐열을 이용하고
열효율이 높으며 다목적으로 쓰이어 예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오늘에는 성냥이나 라이터가 흔하고 불의 철학적 의미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
불씨의 보관에 무척 신경을 썼고
나라에서도 청명에 새 불씨를 일으켜 신하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한식 때 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충신 개자추의 넋을 기린다는 속설도 있지만
실은 나라에서 내려오는 새 불을 쓰기 전의 공백인 것이다.
또한 이때쯤이면 기후가 건조하여 산불이 나기 쉽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함도 있다.
화로는 이 불씨를 보관하는 용도이기도 했다.

화로를 쓰려면 아궁이에서 불을 끄집어내는 불고무래가 있어야 하고
이를 퍼담을 부등가리가 있어야 한다.
손바닥만한 부삽은 재를 꼭꼭 눌러 불이 사위는 것을 막는 데 썼고
불덩이를 헤치거나 끄집어내는 부젓가락이 있고
불씨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불을 눌러 두는 불돌이 있다.
또 냄비 등을 올려 끓일 수 있는 삼발이가 있고
다리처럼 화로에 걸쳐 얹고 뚝배기 등을 올려놓을 수 있는 다리쇠도 있다.


양주동은 ‘사랑은 눈오는 밤에’라는 시에서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
눈오는 밤이어든 모름지기 사랑하는 이와 화롯가에서 속삭이어야 한다>고 노래했다.
백락천은 ‘벗에게’라는 시에서 <화롯불 피워 놓고 술을 따끈히 데워 놓았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이 밤 와서 한잔 하지 않겠는가>라고 노래했다.
정목월은 「한국의 혼 」이란 책에서 눈보라가 치는 한국의 겨울밤, 천지도 분간할 수 없는
이 밀림같이 눈발이 날릴 때 온돌방의 화롯가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나누는 정경이야말로 겨울밤의 맛이라고 했다.


화로를 보면 궁둥이에 전해오던 온돌의 따끈함과 문풍지를 울리며 불던 바람, 머리가 서늘하던 웃풍을 떠올리게 된다.
밥주발은 아랫목 이불 속에서 익어가고 된장찌개는 불돌 위에서 보글보글 끓는 광경은
인두를 데워가며 호롱불 밑에서 섶을 다리고 도련을 후려꺾던 여인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다툰다.

스위치만 누르면 순간 더워지는 가스난로나 전기난로 팬 히터에 익숙한 세대는
연탄난로와 연탄재, 숨구멍과 헝겊마개, 두꺼비집과 연탄집게를 모른다.
달라붙은 시뻘건 연탄을 칼로 떼어내는 것을 모른다. 연탄 갈 때 숨이 칵칵 막히며 기침을 하는 것도 모른다.
조개탄난로, 심지상하식 석유난로도 모른다. 또한 화롯불에 구워먹는 군밤이나 감자의 맛도 모른다.
화롯불처럼 은근하고 뭉근하고 끈기있는 정을 알 리 없다.

참사랑은 원터치 전기난로가 아니다. 매콤한 잿내음을 마다 않고 인두도 품고
군밤도 품고 된장도 끓이며 불돌을 껴안으며 한몸 사그라질 때까지
서서히 식어 가는 끝없는 베풂의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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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





참나무 희나리는커녕
마들가리 죽대기도 변변치 않아
검불 짚불 삭정이 솔가리

미더운 불돌 가슴에 얹으면
쑤셔대는 부젓가락에도 이젠 꿈꾸지 않아
때로는 진주인 냥 인두도 품고
모르는 체 알감자 고구마 밤도 기르며
다리쇠 위엔 뚝배기도 보그르르

올망졸망 오손도손 곱은 손 녹일 때
매콤한 잿내음 시린 코에 포근하고
문풍지에 떨던 외풍 수줍어 스러지다

언제나 강참숯만 잉걸불이라
뜬숯도 잿불도 내사 좋구만
그렇고 그런 한세상 무엇이 급하여
싱숭생숭 안달복달 조바심
헤픈 정 애간장에 난딱 옥생각이랴

안으로만 파고드는 야무진 끈기는
나붓이 무릎 아래 감추고
알알이 맺히던 진홍빛 옹이는
스르르르 밤새 사그라지다



가옥구조상 화로의 필요성
여름과 겨울의 차가 심한 우리나라에서 사계절에 두루 잘 맞는 집형태를 갖추는 게 사실상 어려운 일이어서
겨울의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많은 애를 써왔다. 그런 과정에서 자그마한 방과 불의 성질을 가장 잘 이용한 온돌, 부엌 등의
가옥구조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보조난방기구로써의 화로의 역할이 있다

화로의 종류
질화로: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쓰던 거무르름한 색의 질화로는 옹배기처럼 전이 없이
아가리가 넓고 둥글넓적하며 양 손잡이가 달려 있다.
오지화로: 오지화로는 모양과 색은 좋으나 불을 담을때 주의하지 않으면 쉬 터지는 단점이 있다
돌화로: 돌은 한번 데워지면 따뜻한 기온을 오래간직하고 그 형태에 공예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여
상류층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화로는 한두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다
무쇠화로: 서민들이 가장 많이 쓴 화로로 바닥에는 보통 발이 셋 달려있어서 쇠가 달아 방바닥이 눋게 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놋화로: 부잣집의 사랑채에서 쓴놋쇠로 만든 화로로 아가리에 비교적 넓은 전이 달리고
다리의 윗 부분에는 개다리처럼 앞으로 조금 돌출된 특징을 지닌다.
전이 달려 있다고 해서 전화로라 불리었다.
손화로: 놋쇠, 철, 백동 따위로 만들어 선비들이 겨울밤 공부에 열중하다가 언 손을 잠시 비비기도 하고
담뱃불을 붙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가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한다
곱돌화로: 곱돌로 만들었고 온기를 오래 간직하고 여러무늬를 장식하였다
은입사백동화로; 백동으로 만들고 은실로 수복강녕이나 길상무늬를 넣은 넣은 소형화로

화로에 쓰이는 도구
불바가지(비댕이,부등가리) ,불고무래, 부삽, 주걱 모양의 부손, 불을 헤치는 데 쓰는 부젓가락 등이 있고,
재를 덮어주는 불돌, 음식을 데울 때 쓰는 삼발이, 화로에 다리처럼 걸쳐 위에 무엇을 얹게한 다리쇠, 삼발이가 있다.

화로의 원리
숯불만 가득 담으면 그 사이로 공기가 많이 들어가서 불이 오래가지 못하고, 재만 많으면 기운이 없이 따뜻하지가 않다.
따라서 화로에 불을 담는 데는 불덩이만을 가려서 넣는 게 아니라 적당한 양의 재를 필요로 한다.
밑바닥에 재를 깔고, 다음에는 관솔 같은 오래가는 불덩이를 담고, 마지막으로 재를 마치 아기 포대기처럼
봉긋하게 감싸주어 불이 잘 꺼지지 않았다.

불의 상징성
종가에서 분가하는 집안의 맏아들이 화로에 담은 불씨를 먼저 들고 들어가는 일, 연탄이 주연료이던 시절엔
이사할 때 불이 붙은 연탄을 맨 먼저 옮기는 일, 집들이를 할 때 성냥이나 양초를 사들고 사는일 등은
불씨의 상징성을 뜻한다.
예전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집에 따라서는 불씨가 담긴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었으며,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그 집의 맏아들이 이가사는 새 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성냥이나 라이터를 비롯 불을 지필 수 있는 도구는 물론 기초생활물자조차 궁핍했던 시절,
화로는 가정의 작은 태양이었다. 화로는 언제나 따뜻한 불씨를 안고 우리의 삶을 덥혀 주던 생활도구로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은 또 그의 아들에게까지 대물림 되며 언제나 따스함을 제공했고 또한
가족간 화목한 정(情)을 일깨웠다.

아침 일찍 불을 지핀 아궁이에서 화로에 불씨를 모우면 타고 남은 재로 덮어 잘 다독거리고
오랫동안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으며 이 불은 어른들의 담뱃불, 다듬이질, 찬음식 덥히기,
또한 다음날 아침 아궁이의 불씨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겨울철, 화로는 바같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의 추위를 녹이게도 했고
할아버지의 허리춤 느적이 찬 쌈지에서 눅눅한 황초를 꺼내도록 해 담뱃대에 재고 화롯불에서 장죽의 길이만큼
얼굴을 젖히고는 천천히 물부리를 빨아 입 언저리에서 엷은 안개까지 피워 내도록 하기도 했다.

또 화로는 길쌈하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인두를 묻었다가 동정(옷깃 위에 조붓하게 덧꾸미는 흰 헝겁, 오늘날 옷의 목부분, 칼라)의
다듬이질을 해냈고 귀여운 손자를 위해 알밤이나 고구마를 굽기도 했고 때로는 먹다 남은 된장국이나
식은 죽을 덥히기도 했으며 또한 놋양푼에 엉긴 조청도 녹이고 더러는 부스럼에 붙이는 고약을 눅게 했다. 이
때문에 특히 우리의 어머니가 가장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했던 것이 화롯불이였다.




옛날 우리의 어머니는 시부모 받들기며 남편 섬기기며 또한 자녀들 보살피기와 시누이와 동서 눈치보기도 겨웠는데
부엌일이며 바느질, 길쌈, 농사 뒷바라지는 물론이고 기제사와 거를 수 없는 집안사이의 길흉사가 겹쳐도 가
장 소중하게 보살폈던 것이 화롯불이었다. 어쩌다 화로의 불이 꺼져 이웃집에 불씨를 얻어러 가면 그것은
여자의 게으름 탓으로 돌렸기에 이 보다 더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또 불씨를 나누어주면 그 집의 살림이 나간다는
속설도 있어 누구나 거절하기 일쑤였기에 화롯불을 구하기는 하나의 고통이었다.

우리나라는 뚜렷한 사계절이 있어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리고 기온도 매우 낮다.
우리네 옛집은 이런 추운 겨울날에는 유난히도 윗풍이 세다. 그것은 한옥의 오랜 특징인 온돌과 문실에 바른 한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방안 공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아궁이에서 타고 남은 잉걸불을 화로에 담아 방에 두었다.


겨울철 살림살이의 으뜸

꼭두새벽 어머니는 화로의 불씨를 부엌으로 가져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짓고,
물도 데우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밥이 뜸들 때쯤 어머니의 기상 소리에 마지못해
이불을 밀어낸 아이들은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아랫목은 엉덩이를 대지 못할 정도로 뜨겁지만
문풍지 틈으로 들어오는 찬공기 때문에 아이들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가마솥에 쇠죽을 끓인 아버지는 아궁이에서 활짝 피어 있는 이글이글 한 숯불을
불고무래로 꺼내 부등가리로 화로에 옮겨 담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던 아이들은 새로 담아온 화롯불 주위에 둘러앉아 손바닥을 펴들고 불을 쬔다.
냉기가 돌았던 방안이 금세 훈훈해지고 어느새 따뜻한 새아침이 시작된다.

점심때에는 부젓가락이나 부삽을 화로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나 된장 뚝배기를 데웠다.
혹여 생선토막이라도 있는 날이면 화로에 석쇠를 걸쳐놓고 굽기도 했다.
상이 다 차려지면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밥그릇을 줄줄이 꺼내어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화로는 아이들의 겨울철 주전부리를 위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화로에 차를 달이거나
마른 떡을 석쇠에 올려 구워먹기도 했으며 불길이 사그라졌을 때는 고구마를 잿불에 묻어 두었다가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부젓가락으로 찔러보며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노랗게 익은 군고구마를 젓가락에 꽂아 떠 있는 동치미 한 사발은 주스보다 더 상큼하고 시원했다.

화로는 때로 놋양푼에 엉긴 조청도 녹이고, 종기에 붙이는 고약을 눅이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화로는 이렇게 이동식 난로와 오늘날의 전자렌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